펙트인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해전 순서 업적 본문

펙트 지식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해전 순서 업적

리포트 2018. 5. 19. 10:06

안녕하세요.  펙트인 사이트입니다.


이번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간략한 생애와 업적, 명언 그리고 해전 순서 등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945년(인종 1년) 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입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3살 터울이며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성장한 서애 "유성룡"과 많이 어울렸다고 하는데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이순신에 대해"매우 영리하고 활발하였으며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겼고 어른들도 감히 이순신을 무시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순신은 1576년 32세의 늦은 나이로 어렵게 무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많은 기록에서 이순신은 강직하고 청렴하며 원칙적인 일처리로 인해 때로는 인정을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윗사람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1586년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직하던 중 여진족 상황이 의심스러워 상관이었던 "이일"에게 병력을 지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여진족이 쳐들어와 조선군 11명이 죽고 백성 150여 명이 잡혀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또한 이순신은 전투 패인의 모든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하게 되었지만 다시 여진족 장수를 잡고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고 관직에 복귀합니다.


이후 이순신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1591년 2월 정 3품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며 전란에 대비합니다.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20만 명의 왜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침략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첫 승리 안겨준 전투 "옥포해전"부터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임진왜란 해전도 시작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해전 순서 업적

(날짜, 장소, 왜선 격침 및 성과)


1592년 (음력)


1차 출전

 

5월 7일 옥포 해전 "26척"


5월 7일 합포 해전 "5척" 


5월 8일 적진포 해전 "11척"



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13척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21척"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26척 전멸"


6월 7일 율포 해전 "7척"



3차 출전


7월 8일  한산도 해전 "59척"


7월 10일 안골포 해전 "42척 전멸"



4차 출전


8월 29일 장림포 해전 "6척"


9월 1일 부산포 해전 "128척"



1593년


5차, 6차 출전


2월 6일~3월 8일 웅포 해전 "왜군 100여 명 사망"



1594년


7차 출전


3월 4일 제2차 당항포 해전 "31척"



8차 출전


9월 29일 장문포 해전 "2척"


10월 1일 영등포 해전 "왜선 격파 도주"


10월 4일 제2차 장문포 해전 "대치"



1597년


이렇듯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 모든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하였지만 너무 신중하고 소극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한성으로 압송됩니다.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원균"과 불화로 인한 모함, 또한 이순신을 두려워한 왜군의 계략,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이순신 장군의 우상화에 대한 임금의 견제 등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결국 4월 11일 이순신 장군은 관직에서 해임되고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풀려나기는 했지만 생애 2번째 백의종군(벼슬이 없이 흰옷을 입고 군대에 복무함)을 하게 됩니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7월 6일 치른 "칠전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게 되면서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을 풀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됩니다.


그렇지만 조선에는 이제 단 12척의 배만 남았으며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조정은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으로 편입될 것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왜군이 감히 조선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장계를 올리며 전열을 재정비했습니다.



10차 출전


8월 28일 어란포 해전 "왜선 도주"


9월 7일 벽파진 해전 "왜선 도주"


9월 16일 명량 해전 "31척"


이순신 장군은 일본 왜선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입수하여 단 13척(1척 합류)의 배로 "명량"으로 출전합니다.


"울돌목"이라 부르는 좁고 유속이 빠른 명량해협에서 왜선 133척(징비록 200척, 이충무전서 333척)과 대치하게 된 조선 수군은 이러한 지형을 잘 이용하며 왜선 31척을 격파하며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는 세계 해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믿기 힘든 결과 이로 인해 임진왜란 전세는 역전됩니다.



1598년


11차 출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50척"


9월 19일~11월 15일 장도, 왜교성 "30척 격파, 11척 나포"


11월 19일 노량 해전 "200척 격파"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왜군은 철수를 결정하고 1598년 11월 19일 조선에서 철수하는 200여 척을 격파하고 150여 척을 파손시켰으나 이순신 장군도 왜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합니다.


향년 54년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까지 이순신 장군은 "지금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끝까지 전투를 종용했으며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임진왜란 7년의 전쟁도 끝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 해전 순서와 업적 등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반응형
Comments